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트라스타마라 왕조 === 마리아 사후 시칠리아의 단독 군주가 된 '''[[마르티누 1세]]'''는 1402년 [[나바라 왕국]] 국왕 [[카를로스 3세(나바라 왕국)|카를로스 3세]]의 딸 블랑슈([[수리아 1세]])와 재혼했다. 1409년 사르데냐가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해 그 해 6월 30일 나르본 자작 기예르모 2세가 지휘하는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7월 25일 칼리아리에서 사망했다. 마르티누 1세는 시칠리아 귀족 타르시아 리자니의 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페데리코를 두었고, 또다른 시칠리아 귀족 여성 아가투치아 페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비올란테를 두었다. 아라곤 왕 [[마르틴 1세]](시칠리아 왕으로는 '마르티누 2세')는 아들이 죽자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내세우고 아라곤 왕위 후계자로 계승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점 때문에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410년 5월 31일 마르틴 1세 마저 사망해버리면서, 바르셀로나 왕조는 단절되었고, 2년 후인 1412년 '''[[페르난도 1세(아라곤)|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수립되었다. 왕이 2년간 세워지지 않는 동안, 시칠리아는 마르티누 1세의 미망인인 나바라의 블랑슈와 사생아인 페데리코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페르난도 1세는 4명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시칠리아로 파견하고 군대를 별도로 보내 상황을 진정시키게 했다. 1415년 위원회가 시칠리아의 평화를 이뤄내자 둘째 아들인 [[추안 2세]]를 시칠리아 총독으로 보냈다. 1416년 4월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후 장남 [[알폰소 5세]]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을 맡았다. 시칠리아인들 사이에서 아라곤 왕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알폰소 5세는 즉각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한 뒤 여세를 몰아 사르데냐 공략에 착수했다. 1420년 5월 24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친히 샤르데냐로 진군해 그곳의 주민들을 복속시켜서 샤르데냐의 지배권을 온전하게 가져간 뒤 코르시카 섬으로 분견대를 보내 칼비 시를 공략하고 보니파치오 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러던 1421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가 [[루이 3세(앙주)|앙주 공작 루이 3세]]의 맹공에 시달린 끝에 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알폰소 5세는 보니파시오 시 포위를 풀고 나폴리로 진군해 그곳을 포위하던 루이 3세를 몰아냈다. 당시 아들이 없었던 조반나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칼라브리아 공작에 지명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5세가 나폴리 국왕을 자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 후 알폰소 5세는 아라곤 통치를 아내 마리아에게 위임한 뒤 나폴리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용병대장으로 고용해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3세와 밀라노 귀족 아텐돌로 스포르차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했다.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스포르차를 지원하자, 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받들기로 하고, 당시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파문된 뒤 입지가 위태롭던 베네딕토 13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얼마 후 전세가 불리해진 스포르차 가문이 루이 3세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하면서, 알폰소 5세의 입지는 굳건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갈수록 커지자 위협을 느낀 조반나 2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을 철회하려 했다. 그는 낌새를 눈치고 1423년 5월 여왕의 연인이자 나폴리 궁정의 유력한 인물인 잔니 카라촐로[* '조반니 카라촐로'라고도 하는데, 잔니(Gianni)는 [[조반니]](Giovanni)의 애칭이다.]를 체포하고 여왕 역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텐돌로 스포르차에게 아라곤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스포르차는 군사를 일으켜 아라곤군을 기습공격해 크게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의 요새인 카스텔 누오보로 피신했다. 그 후 조반나 2세는 카스텔 누오보를 포위 공격했지만 아라곤군의 반격으로 패배한 뒤 아베르사 요새로 퇴각했고,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들였던 것을 취소하고 앙주의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알폰소 5세는 라퀼라에서 조반나 2세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던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카스티야 내전이 동생 후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일단 귀국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하던 중 루이 3세가 소유한 마르세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1432년, 나폴리 왕국의 권신 잔니 칼라촐로가 조반나 2세가 고용한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시가 군사 동맹을 맺고 그를 압박해오자, 어쩔 수 없이 1433년 조반나 2세와 10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예르바 섬에 대한 군사 원정을 감행했고, 1434년 트리폴리 공략에 착수하는 등, 한동안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기울였다. 1434년 앙주의 루이 3세가 사망했다. 조반나 2세는 루이 3세의 형제인 르네를 나폴리의 새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승인하지 않았고, 여왕은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가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인 1435년에 사망했다. 알폰소 5세는 드디어 나폴리 왕국을 공략할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동생 후안, 엔리케, 페드로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공략한 후 가에타를 포위했다. 그러나 1435년 8월 4일 폰차 해전에서 제노바 함대가 아라곤 함대를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후안, 엔리케와 함께 포로로 잡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넘겨졌다. 알폰소 5세는 밀라노에서 교양있는 태도를 보여 비스콘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아라곤 세력이 나폴리를 공략하는 것을 막는 것은 밀라노에 어떠한 이득도 안 된다고 설득했다. 때마침 아라곤에서 남편을 대신해 통치를 행사하던 마리아 왕비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며 남편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헀다. 이에 비스콘티 공작은 1436년 알폰소 5세와 형제들을 풀어주고 앞으로는 아라곤 왕국과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1436년 2월, 알폰소 5세는 시칠리아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남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카푸아를 탈환하고 가에타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 1438년 5월 19일 조반나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르네가 나폴리에 도착하여 '[[레나토(나폴리)|레나토 왕]]'으로서 나폴리 왕을 자처했다. 알폰소 5세는 1439년 9월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동생 페드로가 전사했다. 그 후 르네가 이끄는 앙주 용병들이 맹공을 가하자 아라곤군은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르네가 고용한 용병대장 야코포 칼도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앙주 용병대의 기세는 약화되었다.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해 아베르사, 살레르노, 베네벤토, 만프레도니아, 비톤토를 공략했다. 르네는 교황으로부터 1만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알폰소 5세는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비텔레스 추기경을 매수해 교황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파일:renaissance_italy_by_hillfighter-d3b8nsw.png]] [[파일:aragon.png]] 아라곤 해상 제국 1441년 11월 10일 나폴리를 포위한 아라곤군은 수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1442년 6월 2일 공략에 성공했다. 르네는 앙주로 도피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에 입성한 뒤 나폴리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이래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왕국에 의해 통합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알폰소 5세가 스포르자 가문과 맞서고 있는 교황군을 지원하는 대가로 나폴리의 왕으로 인정했다. 알폰소 5세는 마요르카의 건축가 기옘 사그레라(Guillem Sagrera)에게 카스텔 누오보 요새에 궁정을 세우게 한 뒤, 다시는 아라곤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폴리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알폰소 5세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나폴리에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1443년 나폴리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카스텔 누오보 정문에 웅장한 [[개선문]]을 세웠다. 또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를 즐겨 읽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사를 매일 읽는 등 고전 문학을 탐독했다. 또한 시칠리아 최초의 대학인 시치랄레 스투디움 제네날레(Siciliae Studium Generale)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도 신경썼다. 그리고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조반니 폰타노(Giovanni Pontano), 안토니오 베카델리(Antonio Beccadelli) 등 인문주의자들을 보호하는 등 이탈리아 문인들을 후원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던 알바니아 지도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를 주목하고, 자신의 봉신으로 삼고 막대한 지원을 해줬다. 여기에 보스니아 공작 스테판 부치치 코사차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 그가 보스니아의 지배를 확고히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이렇듯 발칸 반도의 군소 세력을 봉신으로 끌여들이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장차 발칸 반도로 영역을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1454년 제노바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4년간의 전쟁을 치렀지만 승패가 쉽사리 가려지지 않자, 알폰소 5세는 1458년 6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해 제노바를 향한 공세에 착수하려 했다. 그러나 돌연 중병에 걸렸고, 6월 27일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했다. 동생 [[추안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아라곤,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고,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 1세(나폴리)|페르디난도]]가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후안 2세는 형과는 달리 오로지 아라곤에 전념했고, 시칠리아에는 총독을 보내 알아서 통치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